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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4-28 10:06
[교수신문] 유민영, <21세기에 돌아보는 한국 연극운동사>
 글쓴이 : 관리자(푸…
조회 : 292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87878 [78]

“무대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운명이 이끈 연극인의 삶

깊이읽기_『21세기에 돌아보는 한국 연극운동사』 유민영 지음 | 푸른사상 | 672쪽

편견·굶주림·일제 탄압 버텨내며 무대에 섰던 한국연극인
영혼 진동시킬 수 있는 정신 있어야 영상예술 뛰어넘는다

이화학당 출신의 복혜숙은 목사 아버지가 세운 강원도 학교에서 아버지의 강압으로 적성에 맞지 않는 교원 활동을 할 때 자유를 느낄 수 없었다. 연극을 갈망했던 그녀는 1920년대 초 아버지의 저금통장까지 훔쳐서 무작정 상경했다. 단성사를 찾아가 극단의 말단 예비단원이 되어 잡다한 허드렛일을 했고, 유랑극단을 따라 전국을 떠돌며 온갖 고생을 했다. 유랑 극단 배우들은 굶주린 나머지 도둑질도 했고 가끔 부랑 신파 연극인의 행패가 신문사회면에도 나던 시절이었다. 

결국 현철(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일본 극단에서 활동)이 세운 조선배우학교에 들어갔다가 기방으로 떠났던 복혜숙은 ‘토월회(土月會)’의 출연요청을 받았다. 토월회는 박승희가 순전히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단원들에게 처음으로 월급도 지불하고 있었다. 1920년대 말 토월회에서 최승희의 무용과 함께 복혜숙이 공연한 「아리랑 고개」는 땅과 곡식을 모두 일제에 빼앗긴 조선인이 괴나리봇짐을 지고 고향을 떠나 북간도로 떠나는 내용이었다. 극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극장을 찾은 군중은 표를 사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그 이후, 시대상황을 반영할 수 없도록 하는 일제의 통제로 토월회는 내리막길을 걸었고 박승희는 구한말 총리대신 박정양 대감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300석 지기의 땅을 모두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는 쓸쓸한 노년을 보내면서도 연극의 발전을 소망했다. “정신과 육체를 줄기차게 짜내었으나 나의 일생 사업인 연극은 아무 성공이 없이 흐지부지 흘러가고 말았다. 전국을 두 번이나 돌고 방방곡곡에 연극의 싹을 던졌으니 이 싹이 터져 자라기만 바란다.” 

 

유치진, 치안 문란 죄목으로 호출

「아리랑고개」처럼 관객에게 감동을 주면 일제는 곧바로 탄압했다. 도쿄대, 와세다대, 호세이대 등 연극사상 가장 화려한 학벌의 유치진, 서항석, 정인섭, 홍해성 등의 회원으로 구성된 ‘극예술연구회’가 1937년에 공연한 「목격자」는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다 죽은 유대 청년의 실화를 극화한 작품이었다. 기관총에 맞아 죽은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독백으로 외쳤다. “내 아들 미오야 … 무슨 일에도 굴하지 않고 일어서서 끝까지 싸워서 당당히 패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대지에 태어난 인간의 영광이란 말이다!” 관객들은 막이 내린 뒤에도 극장을 떠나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일본 경찰은 유치진을 치안 문란의 죄목으로 경찰서로 호출했고, 극예술연구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연구회’라는 명칭을 떼야 했고 일본직업극단과 마찬가지로 ‘좌(座)’를 붙여 극연좌(劇硏座)로 불리게 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후, 유치진은 1957년 세계일주 연극여행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고나서 “그런 극양식이 미래 연극에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고 직관했다. 언어 연극의 답답함을 극복하고 템포도 빠른 뮤지컬이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다는 게 유치진의 생각이었다. 

유치진에 이어 정통 신극의 맥을 이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해랑은 고조부가 철종의 사촌이고 선친이 1910년에 일본 교토제대 의학부에 유학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4세 때 모친과 사별하고 휘문고보에 진학했을 때는 항일동맹 휴학 주동자로 몰려 퇴학당했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장개석 군대의 에이전트로 몰려 일본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는 등 희망이 끊임없이 부서지는 좌절로 점철된 성장기를 보내던 중 연극에 이끌렸다. 1937년에 도쿄학생예술좌에 가입하여 「춘향전」에 농부 역으로 출연했을 때 그는 신기함을 느꼈다. 그는 현실 존재인 자기가 작품 속의 가상인물로 바뀐다고 느끼면서 “내 인생의 안식처가 바로 여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연극을 통해 고독과 소외, 절망의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연극 속의 기쁨을 발견한 나는 행복했다”라고 고백했다.

 

최고 규모의 시설이었던 동양극장

1935년에 개관한 동양극장은 연극 공연장으로서 그 당시 최고 규모의 시설이었고 신파의 기본요소가 다 들어 있는 기생 이야기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무대에 올려 크게 히트를 쳤다. 첫날부터 기생관객으로 만원을 이뤘고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 시골에서도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서대문 경찰서 순사들이 교통정리로 진땀을 뺄 정도였다. 홍도의 착한 오빠 역할을 맡은 황철은 기생들의 인기를 끌었고 못된 남편 역을 맡은 심영은 욕을 먹었다. 이때부터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대중가요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홍도 역을 맡은 차홍녀는 몸이 약했고 폐결핵을 앓고 있었지만 “무대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연기에 헌신했다. 차홍녀는 지방 공연 중 길가에 쓰러져있던 걸인을 위로하고 돈을 쥐여주었다. 그 직후 걸인으로부터 감염된 천연두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1960년 어느 날, “연극을 학문으로서 공부하고 연극을 직업으로 한다”라는 정신을 표방한 ‘실험극장’의 단원이었던 여운계(당시 고려대 국문과 학생)는 평소에 구경도 못했던 자장면 특식을 앞에 두고 감격의 울음을 터트렸다. ‘실험극장’은 서울대·연대·고대 출신의 실험극회가 모체가 되어 출범한 극단이었다. 단원들은 돈이 없었다. 연습을 끝내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그때 가장 싸구려 음식인 수제비국이었다. 어느 날 신문기자로서 월급을 타고 있던 창립멤버가 연습 중인 단원들을 이끌고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곱빼기로 한 그릇씩 시켰을 때 단원들은 모두 여운계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동안 배를 곯으면서 고달팠고 자장면 곱빼기는 큰 격려가 되었다.

연극은 전문화·직업화가 되어야 하고 또한 예술성과 상업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추송웅의 1인극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모노드라마 붐을 일으켰다. 동가식서가숙하면서도 무대를 꿋꿋이 지키던 36세의 추송웅은 기획, 연기, 분장 등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기로 결심했고 전세금을 빼고 빚을 내서 제작비를 마련했다. 인간에게 잡힌 원숭이가 사람이 되는 이야기이므로 6개월 동안 창경원에서 원숭이를 관찰하면서 원숭이와 닮아가려고 노력했다. 1977년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매회 200여 명의 관객을 끌어들였고 1만3천 명의 관중을 동원했다. 지방 순회공연 요청이 쇄도했고 4개월 동안 6만여 명이 관람했다. 연극사의 신기록이었다. 모노드라마에 도전하기 전 추송웅이 대폿집에서 유민영 저자에게 했던 말은 다음과 같았다. “배우는 운명적으로 불행한 직업의 사람들입니다. 가난과 싸우며 철저히 헐벗고 굶주릴 줄 알아야만 하니 말입니다.” 추송웅은 그 후 여러 극단에 불려 다녔고, TV출연교섭도 잦은 인기인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85년 초 감기에 걸린 후 44세의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다.



고행하는 수도자 같은 연극인

1977년 11월에 막을 올린 「아일랜드」는 관객들에게 전율을 주었다. 극단 ‘실험극장’의 이승호(31세)와 서인석(29세) 두 배우가 2시간 동안 작품 전체를 이끌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탄압 상황을 다룬 원작과 똑같이 두 배우는 삭발을 했고, 낯선 ‘흑인 죄수’에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기 위해 이태원에서 흑인 병사를 관찰했다. 재판정을 방청하며 죄수들의 모습도 익혔다. 날마다 흑인 분장을 위해 제도용 잉크를 전신에 바를 때, 그들은 “고행하는 수도자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라고 표현했다. “이제 나는 나의 마지막 길을 떠납니다 … 섬으로 떠나야 합니다 …”라는 마지막 대사 다음에 연극이 끝났다는 신호로 불이 켜졌다. 관객은 한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박수만 쳤다. 극장 바깥에는 유신체제가 갈수록 경직될 때였다. 이승호는 장기 공연의 어려움을 묻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객석에서 터지는 박수 소리는 우리에게 무대에 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와 단국대 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한 유민영 저자(단국대 명예교수)는 「연극평론」 제 43권과 나눈 대담(2006년 11월 14일)에서 연극사 연구를 하면서 항상 의문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연극을 이끈 사람들을 보면 재주 많고 능력이 있어서 연극 말고 다른 것을 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천대를 받으면서 심지어 가산을 탕진하면서도 왜 연극을 했을까? 저자의 결론은 “운명적 견인”이다. 역사라는 생명체가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을 끌어들였고 연극인들은 운명에 빨려 들어가 자신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정보사회, 풍요사회에 접어든 오늘날 우리 연극이 세계 연극의 반열에 들 수 있으려면 특수성 외에 보편성을 획득해야 하며, 연극이 생존하려면 “영상예술이나 프로스포츠 등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량” 또는 “영혼을 진동시킬 수 있는 투철한 정신”을 갖춰야 한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우리 연극이 얼마나 어려운 세상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지를 장터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듯이 썼다고 밝혔다. 쉬우면서도 고품격으로 다듬어진 문체는 이 책에 내포된 강점 중의 하나다.

교수신문, "“무대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운명이 이끈 연극인의 삶", 유무수 객원기자, 202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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